The Life Code

여유를찾아걷기

 

대한민국 사람들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말 중 하나가 ‘빨리’라는 단어이다. 데드라인이 있어서 분명 그때까지 끝내면 될 일도 빨리 미리 완성해서 결과를 가져오기 바라고, 밥을 먹으러 식당에 들어가서 반찬이 조금 늦게 나오면 빨리 달라고 아주머니를 부르고, 이제 겨우 만남을 시작한 연인들도 며칠 만에 빨리 사랑에 빠지기를 원하고, 결혼 생활을 막 시작한 부부도 결혼과 동시에 빨리 행복한 결혼 생활이 펼쳐지기를 원한다.

 

물론 대한민국 국민에게 이 빨리빨리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전세계에 유래가 없을 만큼 빠른 성장을 이루고 지금 이렇게 누리고 살고 있는 것임을 너무 잘 안다. 분명히 인정하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이제는 성장을 더 고도화 시키고 함께 풍요로움을 나누면서 살아가야 할 때인데, 아직도 숨만 헐떡거리는 모습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회사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연인과, 숱한 지인들 틈에 끼여서 무슨 말인가를 내뱉어야 하고, 귀기울여 그들에 말을 들어야 했다면 하루쯤은 모두 훌훌 털고 나 만의 여유를 찾아서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여유를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곳이 꽤 많다.

 

멀리 나가기는 귀찮지만 가까운 곳에서 코에 찬바람을 불어 넣어주고 싶다면 집 근처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을 찾아가 보자. 감사하게도 우리 집 근처에는 큰 공원도 있고, 오래된 큰 아파트 단지가 있어서 그 곳만 가도 가을이면 풍성한 단풍을 감상할 수 있고, 겨울이면 눈꽃을 볼 수 있다. 적당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모자 하나 푹 눌러 쓰고 손에는 아무 것도 들지 않고 주머니에 mp3 하나만 꽂고 무작정 나가 보는 거다. 내가 사는 동네이지만 전혀 색다른 기분을 맛보게 될 것이다.

 

매일 새벽 일찍 출근하고 밤 늦게 퇴근을 하면서 항상 해가 진 우리 동네 모습만 익숙한데, 이렇게 동네 걷기투어를 하다 보면 정겨운 모습을 많이 만나게 된다. 예전만큼 흔하지는 않지만 놀이터에서 자기들만의 룰을 만들어서 신나게 뛰어 노는 꼬마들, 가족처럼 키우는 강아지들을 데리고 나와 산책을 시키는 아주머니, 그 강아지가 귀엽다고 좆아 다니면서 신기하게 만져보는 아이들, 어디 계모임이라도 가시는지 한껏 차려 입고 동네가 떠나갈 듯이 큰 목소리로 수다를 떨며 종종 걸음을 걷는 아줌마 부대, 쉬는 시간을 이용해 조금이라도 더 간식을 먹기 위해 교문을 빠져 나온 중고등학생들. 그러다 문득 과일가게 앞이라도 지나치다가 귤 8개에 삼사천원씩 하는 것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이런 모습 속에 동화되어 걷다 보면 매일 그렇게 숨가쁘게 살지 않아도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내일부터는 큰 숨 좀 내쉬면서 옆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에도 관심 가지면서 살아봐야지 라고 중얼거리며…

 

집이 아니라 이미 직장에 있거나 볼일이 있어서 시내 한복판에 와 있다면 일을 마치고 이 안에서 여유를 찾는 것도 좋다. 나는 대한민국 서울이 정말 좋은 이유가 편리함이 집약되어 있으면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여유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뜨거운 커피 한잔 들고 종로 한복판에서 살짝 걸음을 옮겨 서대문 방향으로 걸어보자. 그 수많은 빌딩 숲 가운데 평화로운 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광화문 사거리에서 신촌 방향으로 더 걷다 보면 정동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를 떠올리며 그 길을 걸으면, 잠시 타임머신을 타고 대한제국 시절 말기 쯤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든다. 천주교 성당, 성공회 성당, 기독교 교회들이 한데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것이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며 결국은 정겨운 모습으로 정착한 듯이 보여 편안한 마음이 든다. 이 마음으로 이화여고 앞을 지나면 왠지 이곳에서는 부모님 세대가 입었을 것 같은 교복을 입고 수다쟁이 여고생들이 마구 뛰어 나올 것만 같다. 조금을 더 걸으니 오래된 정동극장이 보인다.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오는 관광명소이지만, 나에게는 1층의 차분한 카페와 학생시절 쫄래쫄래 찾아와 본 유리상자의 공연이 더욱 기억나는 곳이다. 이렇게 터덜터덜 걷다 보면 정동교회 끝자락에 왼쪽으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보이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면 멋진 유리건물로 된 JP Morgan 서울 오피스가 보인다. 편안한 마음으로 회사에서의 스트레스를 날려 버리기엔 그저 터벅터벅 걷기 더없이 좋은 곳이다. 잠시 자동차 소음으로부터 피해있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정동 한 바퀴를 돌아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걸어 나오면 짧지만 홀가분한 걷기가 끝난다.

 

사실 여유 있게 걸어보고 싶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복잡한 시내 한가운데서도 가능하다. 단 뛰지 않고, 앞만 보지 말고,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들도 쳐다보고 건물 안에서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있는지도 들여다 보고, 손잡고 가는 연인들, 바쁘게 통화를 하며 뛰어가는 사람들, 서울 구경에 신이 나서 두리번 거리는 외국인까지 두루 보며 걸으면 된다. 이 때 크게 심호흡 한번 하면 된다. 생각보다 쉽게 발걸음의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이다.

 

한 쪽으로 치우지지 않고 균형을 이루며 살아간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과 누구나 그런 삶을 꿈꾸며 살아가고 있는데 정작 실천하기 녹록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항상 현실에 끌려 다니기만 하는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을까? 당장 편안하게 다리에 긴장을 풀고 주변부터 천천히 걷는 것으로 이런 소소한 서글픔에 종지부를 찍으면 좋겠다. 작은 여유를 찾아가며 더 큰 여유를 꿈꿔보는 시간이 독자들의 마음을 한결 넓고 평온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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