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직장 생활 초기에는 회사에서 지급한 도장이 있었다. 결재 서류를 올릴 때 결재란에 도장을 찍는 기분이란 정말 멋진 것이다. 보고서를 마쳤다는 뿌듯함, 내가 보고서를 만들었다는 증거. 회사에서 지급한 도장의 반대 편에는 아주 작은 크기의 도장이 있다. 이는 뿌듯함을 주는 도장이 아니다. 어딘가 실수를 했을 때 찍는 작은 날인이다. 은행에서 담당자가 전표에 찍는 작은 바로 그 도장이다.
어느 순간부터 날인을 해도 좋다는 회사의 규정이 시작되었다. 날인을 해도 좋다는 것은 개인의 상징을 사인으로 남겨도 좋다는 의미이다. 공식서류에 날인을 해도 좋다는 의미는 내 사인이 이제 공식적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초등학생이 둘째 딸이 노트에 뭔가를 공들여 연습하고 있다. 슬쩍 무얼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멋진 사인을 만들고 있단다. 이름을 흘겨 써 보기도 하고 영어로 써 보기도 한다. 이름 마지막에 하트를 그려 보기도 하는 등 사인 놀이에 푹 빠져 있다.
우리도 오늘 하루는 사인 만들기 놀이에 빠져 보자. 물건을 살 때도, 서류에 날인할 때도, 은행에서 인출을 할 때도 사인이 필요하다. 이왕 하는 사인 멋지고 폼나게 만들어 보면 좋지 않을까?
사인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은 누구의 사인인지 식별 가능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인을 너무 쉽게 만들면 다른 사람이 도용할 수도 있다는 걱정에 어렵고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인이라는 것이 너무 쉽게만 만들지 않으면 위조가 쉽지 않다. 사인은 도장을 대신하는 것이니 오히려 쉽게 알아 볼 수 있도록 작성함이 좋겠다.
한자를 잘 쓰는 사람은 자신의 이름 글자 중 하나를 멋지게 한자로 써 봄도 좋겠다. 식별이 분명하고 한자는 글자체가 확연하게 달라지니 위조의 가능성도 높지 않다. 예전의 내 사인은 영어 이름을 흘려 쓰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보니 지나치게 길고 복잡하여 식별은 되나, 멋져 보이지 않았다. 내 사인을 바꿔보아야 되겠다라는 생각을 했던 날이다.
소위 잘 나가는 회사의 임원이 내가 올린 보고서에 날인한 사인을 보았다. 허 참. 참으로 간단하고 명료하다. 그리고 선이 굵다. 다른 임원의 사인을 살펴 보니 비슷한 공통점이 있다. 간단함. 명료함. 굵은 선. 식별이 가능한 뚜렷함.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사인은 복제가 어려운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보다는 식별이 쉽고 분명함이 성공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사인의 공통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감하게 내 사인을 변경하였다. 내 영어 이름의 이니셜 만인 YKLEE 만을 쓰는 것이다. 훨씬 간단하고 선이 두툼하다. (사인을 바꾸고 나서 내 인생에 많은 긍정적 변화가 있었다. 소위 말해 일이 잘 풀리게 되었다.)
유명한 식당에 가면 연예인들이 방문하고 나서 기념으로 남긴 사인들이 잔뜩 붙어 있다. 아주 난해하고 한편으로는 예쁜 모습의 사인들이다. 팬들에게 사인을 많이 남기는 연예인들의 사인은 그래야 할지도 모른다. 어떤 연예인은 사인 밑에 한글 정자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경우도 많다. 사인은 내 이름 위에 화장을 하는 것과 같다. 사인 밑에 다시 이름을 사인하는 것은 가면을 쓰고 팬들을 만나는 것과 같다.
물건을 사거나 식사를 하고 나서 카드 결재를 하는 경우에 하는 사인도 마찬가지다. 대출 손톱으로 휙 일자로 갈기는 사람도 있고 정성스럽게 쓰는 사람도 있다. 굳이 정성을 들여 정자로 사인을 남길 필요는 없더라도 정성이 전혀 없는 손톱으로 한 일자를 그어 주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사인은 내 족적을 남기는 일이다. 하찮은 일이든, 멋진 결과물의 보고이든 내 이름과 얼굴을 걸고 남기는 족적이다. 복잡하고 어려워서 정성을 더하기 힘들다면 오늘은 간단한 사인을 만들어 보자.
이런 방법은 어떨까? 회사에서 두 개의 날인 도장을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작은 사인과 큰 사인을 만들어 본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