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Code

안개속에서찾은나만의길

 

몇 년 전이었다. 풋풋한 사랑을 시작하려던 그 때에 남산 위를 올랐다. 케이블카를 타고 쌩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천천히 걸어 올라갔고 그렇게 올라간 남산 위에는 산 중턱에 걸린 구름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지상 세계에서 항상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봐야만 있는 구름, 비행기를 타야 내 눈 아래에 펼쳐져 보이던 구름이 그 날은 내 몸을 감싸고 있었다. 마치 비가 오는 것처럼 촉촉한 물방울들이 내 눈높이에서 느껴졌고, 희뿌연 광경이 바로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100% 구름이라고 하기 보다는 안개와 구름이 섞여서 그 정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광경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문득 화창한 날씨가 아니라 오히려 안개가 자욱하게 끼여 있을 때 혼자 걷는 사색의 여행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색을 하는 건 주로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이 있거나, 당장 눈 앞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들 때문이다. 명쾌한 해답을 알고 싶지만 아무도 그 답을 알려주지 않아서 스스로 답을 찾아야 할 때, 그 시간이 얼마나 지나야 자연스럽게 해결이 될지 알지 못할 때 우리는 몰입하고 사색한다. 머리 속에서는 고민이 가득하지만, 현실 속에서 해야 할 일들을 모두 정상적으로 하면서 생각에 몰입하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럴 때는 현실 속 의무들이 훨씬 강압적인 힘으로 고민을 눌러버린다. 더 집중해서 고민하고 그 껍데기를 뚫고 나와야 성장함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 물리적으로 안개가 자욱한 곳을 찾아가보라. 한 발 앞도 보이지 않아 발걸음을 내딛기가 어려운 그런 안개 속으로 가보라. 작은 물방울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만들어낸 안개는 허상 같기도 하지만, 자욱한 안개 앞에서 우리는 한 발자국도 내밀기가 어렵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런 힘이 없어 보여 손으로 휘휘 저어도 잡히지도 않는데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치워 없앨 수도 없다. 앞으로 가고 싶지만 방향을 알 수 없으니 꼼짝도 할 수 없다. 힘 없는 안개 앞에서 우리는 무력하게 서 있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제들처럼 나를 옥죄어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똑같다. 혹시 나침반이 있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방향은 알 수 있겠지만, 눈 앞을 가로막은 막막함 때문에 무서운 장애물이 있거나 푹 패인 구렁텅이가 있을 까봐 여전히 발걸음을 떼는 것은 어렵다.

 

제주도 산굼부리. 웅장한 산굼부리 분화구는 자주 끼는 짙은 안개를 방패 삼아 제 모습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 굳이 숨어 있으려는 산굼부리를 보려고 애쓰기 보다 오히려 전면에 앞서 나온 안개를 온몸으로 느끼러 그 곳에 가보자. 산세가 험한 지리산에서 만나는 짙은 안개는 경이로움과 나의 초라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이른 아침에 만날 수 있는 물안개를 보고 싶다면 충북 제천에 있는 충주호나 강원도 가는 길에 많이 볼 수 있는 호수나 댐들을 찾아가보라. 자욱한 안개 안에서 가만히 멈추어 서서 그 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내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 보라.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다리에는 여전히 강한 힘이 비축되어 있는지, 얼굴과 머리는 윤기를 잃고 흐리멍텅 해진 건 아닌지 꼼꼼히 살펴보자. 이 안개가 걷히면 목적지를 향해 똑바로 갈 수 있는지 나를 정비하는 시간을 안개 속에서 가져보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서서히 햇빛이 비치고 기온이 올라가면 자욱했던 안개가 스멀스멀 그 모습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나를 막막하게 만들었던 그 강력한 캄캄함이 사라져간다. 그 찰나의 모습과 느낌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토록 고민이 되는 그 문제들도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때에 적당한 시간이 흐른 뒤, 자연스럽게 물러갈 수 있다는 사실을 사라져가는 안개를 보며 깨달아야 할 것이다.

 

안개가 걷히고 나면 산굼부리의 멋스러움과 거친 지리산의 웅장함과 고요한 호수의 평화로움이 더욱 찬란하고 선명한 아름다움으로 눈 안에 들어 온다. 집중해서 한 사색의 결과, 인생을 던져 가야 할 바가 더욱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안개는 무섭기도 하지만 아름답기도 하다. 우리의 사색은 두렵고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성숙한 성장을 가져오기도 한다. 안개 속 여행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 안개가 짙을수록 뒤에 가려진 경치는 더 멋진 모습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안개가 없는 여행은 무미건조하고 신비로운 매력도 없다. 촉촉한 안개의 물방울이 공기 중에 너무 촘촘히 가득 차서 그 안에 서 있는 우리의 옷을 많이 적신다고 해도, 그 물방울로 우리의 피부와 머리는 잠시 매력적으로 젖어 있을 수 있고, 곧 태양이 떠오르면 간단하게 말라서 이전에는 몰랐던 뽀송뽀송한 느낌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안개 속 여행. 신비함을 기대하고, 더 큰 모험심을 가지고 즐겨보자. 안개 속에 혼자 서 있던 아이 같은 내가 어느 새 키가 훌쩍 커버린 청년의 모습으로 변해있을 것이다.

공유하기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
반응형